작성일 : 13-03-11 16:09
법정 스님 3주기 맞아 만난 미황사 금강스님과 임의진 목사의 아름다운 동행 10여년
 글쓴이 : 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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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해남군 미황사의 부도전 길목에 나란히 앉은 금강 스님(왼쪽)과 임의진 목사. 이들은 “법정 스님은 틀에 얽매이지 않는 맑고 향기로운 삶의 사표”라면서 "평생 구름처럼 떠돌며 마음공부를 하고 사람들과 나누는 삶을 실천하고 싶다"고 말했다.

“주지(住持) 오래하면 지주(地主) 됩니다.”(임의진 목사·45) “난, 달릴 주(走)자, 주지예요.”(금강 스님·47) 법정 스님의 3주기(11일)를 엿새 앞둔 5일 전남 해남군 땅끝마을의 미황사 부도전(浮屠殿·고승의 사리나 유골을 넣은 탑들이 있는 곳)에서 만난 두 사람의 대화는 거침이 없었다. 요즘 세간의 상식대로 처신한다면 좀처럼 가까워지기 어렵다는 스님과 목사. 그러나 말 한마디에 미소가 번졌고 때로 박장대소가 터졌다. 두 사람이 나눠온 10여 년의 삶에는 법정 스님이 추구해온 무소유의 향기가 감돌고 있다. 》

법정 스님은 생전에 고향인 해남의 미황사 부도전과 동백을 귀하게 여겼다. 3월 미황사 동백은 4월 선운사의 그것과 다르다. 꽃도 더 작고, 붉은색도 덜하다. 금강 스님은 남쪽 바다의 바람과 햇볕 속에 수줍게 모습을 드러낸 동백을 가리키며 “부족하지도 넘치지도 않아 법정 스님이 더욱 좋아했다”고 말했다.

○ 절의 엄마 종과 교회의 아기 종

부도전은 법정 스님이 자주 찾던 곳이다. 창건 1200여 년이 넘은 이 사찰에서 명멸한 스님들의 흔적이 오롯이 남아 있다.

“법정 스님은 미황사를 찾으면 꼭 부도전을 참배했고, 길목의 새와 꽃들 하나하나에 감탄하기도 했습니다.”(금강 스님)

“이 길을 산책하다 떠돌이별 같은 목사에게 농담도 하고 곁을 쉽게 내주셨어요.”(임 목사)

자리를 옮겨 주지실에서 차 한 잔을 나눌 때 미황사 범종이 울렸다. 임 목사가 그 소리에 빙긋 웃으며 “엄마 종소리가 강진까지 들리겠네요. 아기 종도 울 텐데…”라고 했다. 이게 무슨 소린가?

사연은 임 목사가 강진군 남녁교회 담임목사로 있던 때 얘기다.

“스님들과의 인연도 있고, 미황사는 천년 고찰 아닙니까. 그래서 미황사를 남녁교회의 본사(本寺)로 모셨습니다.(웃음) 본사에서 범종 불사를 한다고 하기에 교회에서 성금을 모아 23만 원을 보탰죠.”(임 목사)

“27만 원.”(금강 스님) 준 사람은 적게, 받은 사람은 많게 말한다.

“교회 종이 오래돼 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 (미황사) 범종 만들 때 작은 종을 하나 만들어 (교회로) 보냈습니다.”(금강 스님)

“정말 남는 ‘장사’였죠. 교회가 사찰 불사에 기부금을 내고, 사찰이 다시 교회에 아기 종을 달아줬으니. 이런 일은 한국 종교사에서 처음 있는 일이자 마지막 사건일 겁니다.”(임 목사)

○ 지게 스님과 다중예술인

금강 스님은 전 주지 천공 스님과 10여 년 전 폐사(廢寺)에 가깝던 미황사를 매년 10만 명이 찾는 곳으로 변모시켰다. 미황사는 한 해 외국인 200명을 포함해 5000여 명이 찾는 템플스테이 대표 사찰이 됐고, 괘불재와 한문학당, 산사음악회로 널리 알려졌다.

금강 스님은 사찰 환경을 바꾸는 과정에서 돌을 지게로 날라 한때 ‘지게 스님’으로 불렸다. 나중에는 아예 포클레인 기사 자격증까지 땄다.

“한동안 실천불교승가회 소속으로 종단과 사회 개혁을 위해 뛰어다녔죠. 1990년대 말 종단 일이 어느 정도 가닥이 잡히고, 심신도 지쳐 미황사로 왔어요. 부처 시절 승단(僧團)처럼 미황사를 이상적 공동체로 만들고 싶었습니다.”

임 목사의 집은 3대째 목사다. 지금도 그렇지만 어릴 때부터 새벽 기도와 규율 등 속박을 유난히 싫어하던 그는 한 살 위의 다운증후군 환자였던 형이 17세로 세상을 뜨자 목회자가 될 것을 결심했다. 신학대학원 시절 마르크시즘과 타고난 자유인의 영혼을 오가던 그는 1995년 남녁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했다.

“처음 가보니 할머니 신자가 10명 정도 있었어요. 십일조랄 것도 없었죠. 대신 할머니들이 참기름을 주셨어요. 그 맛에 빠져 10년을 금세, 즐겁게 보냈습니다.”(임 목사)

“그래도 본사가 조금 낫네. 난 가끔 김도 들어오던데, 하하.”(금강 스님)

임 목사는 2005년 전남 담양군의 산골로 들어갔다. 회선재라고 이름 붙인 흙집에서 시인이자 화가, 음악인 등 이른바 ‘다중예술인’으로 살아가고 있다. 광주지역 문화예술인들이 모이는 ‘메이 홀’ 관장이기도 하다. 15∼31일 메이홀에서 시인 박남준과 전시회를 갖는다.

○ 법정 스님의 향기

“담양 집도 미국에 거주하는 스님이 빌려준 공간입니다. 부처님 덕분에 살고 있는 개신교 목사인 셈이죠. 허허, 제 스스로도 불심을 지닌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합니다.”(임 목사)

“올해 초 주지 그만두려고 했지만 뜻을 못 이뤘어요. 주지로 더 살면 미련 생길 것 같아서요. 언제라도 떠날 수 있는 객의 마음으로 살고 있습니다.”(금강 스님)

두 사람은 자리랄까, 힘이랄까 이런 것들엔 도통 관심이 없다. 법정 스님의 가르침 영향일까.

“돌아가시니 어른 스님의 소소한 행적들이 떠오릅니다. 맑고 아름다운 삶을 잘 즐기고 가셨어요. 이제는 존재로 만날 수 없지만 그 향기로 사람들 곁에 여전히 계십니다.”(금강 스님)

“불가에서 달을 봐야 하는데 가리키는 손만 본다는 말이 있죠. 불교로 얘기하면 겉모양이 아니라 부처님 말씀, 그 법을 따라 살아야죠.”(임 목사)

댕 댕 댕…, 어둠을 재촉하는 범종 소리가 남다르게 들렸다. 그 사이 남녁교회 아기 종도 울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해남=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출처 : http://news.donga.com/Culture/3/all/20130311/536001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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