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5-05-31 16:05
해인지에 실린기사
 글쓴이 : 금강
조회 : 135  
육지의 최남단 땅끝에 미황사라는 아름다운 절이 있다. 남도의 금강이라 불리는 달마산의 기암괴석이 병풍처럼 둘러치고 앞으로는 서해 바다가 펼쳐진 모습이 그림 같은 절이다. 한번 미황사를 다녀온 사람은 누구나 그 장관을 설명하느라 입에 침이 마른다.
아름다운 절에는 아름다운 사람이 어울린다.
미황사 주지 금강 스님은 아름다운 이다. 아름다움을 볼 줄 알고 그것을 조화롭게 표현해낼 수 있고, 이용할 수 있는 아름다움의 연출자.
미황사는 진흙 속에 묻힌 보석이었다.
신라 경덕왕 때(749년) 창건된 천년 고찰로 한때는 300여 스님들이 거주할 만큼 규모가 큰 사찰이었다는데, 100여 년 전 중창불사를 위해 화주 나간 승려들이 풍랑을 만나 조난을 당하면서 급격히 폐사의 길을 걸어왔다.
스님이 있기에 절의 명맥을 유지하기는 했지만 머무는 이마다 병이 들어 오래 살지 못하고 떠나곤 했단다. 과거의 번창하던 시절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고승들의 흔적을 알 수 있는 부도전뿐이었다.
사람이나 절이나 기복이 있고 때가 있는 모양이다. 어쩌면 오랜 세월 인연을 기다려 왔는지도 모르겠다.
16년 전 미황사에 금강 스님이 처음 발을 들여놓았다.
광주에서 사회운동에 뛰어들었다가, 내 공부의 절박함을 깨닫고 대흥사에 와서 백일기도를 마친 직후였다. 평소 안면이 있던 미황사 주지스님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몸이 안 좋아 더 이상 버틸 수 없으니 미황사에 와서 살라는 것이었다.
마침 은사스님을 모시고 살 곳을 찾던 중이라 서울 개운사에 계시는 자운 스님을 모시고 미황사로 내려왔다.
당시 미황사는 폐사나 다름없었다. 절 주변은 삼나무가 숲을 이루어 음습했고, 달마산도 보이지 않았다.
어느 날 은사스님이 나무의 가지치기를 하는 제자에게 “이곳의 병통의 원인은 나무인 것 같으니 나무를 베자”고 제안하셨다. 그날부터 스승과 제자는 하루종일 나무만 베었다.
나무가 잘려나가고 서서히 빛이 들기 시작했고, 비로소 대웅전에서 달마산 정상이 보이고, 앞으로 너른 바다도 눈에 들어왔다. 미황사가 아름다움을 되찾은 것이다.
금강 스님은 미황사가 너무 아름다워 떠나야지 생각했단다. 부족함이 없으니 공부가 안 된다 싶었다. 그 생각이 씨가 되었는지 실제 한동안을 떠돌다 미황사로 돌아왔다.
그러나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다. 아름다운 곳에 살기에 아름다움에 물들어 아름다움만 보고 살 수 있다고. 스님은 이제 사람들을 보면 그이의 좋고 아름다운 점이 눈에 들어온다나.
금강 스님은 사람들과 차 마시며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한다. 한가할 때는 방문 앞을 지나는 사람 불러들여 차 한 잔 하며 이야기하고, 어떤 때는 마당에서 절 구경하는 가족들을 데리고 들어올 때도 있다.
지난 99년 본의 아니게 갑자기 미황사 주지 대행을 하게 됐을 때, 스님은 몇 달 동안 하루종일 그렇게 차 마시며 지내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나중에는 스님과 차 마시기 위해 순서 기다리는 불자들이 마루에 꽉 차더란다.
스님의 말은 마치 졸졸졸 흐르는 시냇물 같다. 바위에 부딪치기도 하고 구석진 돌틈을 살짝 돌기도 하면서 구석구석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기자 역시 밤늦도록 그 물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런데 그 내용을 되짚어보니 계곡처럼 깊고 바다처럼 넓고 파도처럼 힘이 넘친다. 묘한 대조, 그러나 조화롭다. 달마산과 미황사도 그러하다.
기암괴석의 기이한 형상이 강한 기운을 내뿜는 듯한 달마산, 그런데 거기서 내려와 미황사를 감싸고 있는 봉우리들은 무척 포근하고 따뜻해 보인다.
자연과 사람이 닮았다.

미황사와의 인연은 은사스님과 함께 온 1989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그동안 스님이 계속 미황사에 머문 것은 아니었다.
91년 스님은 승가대에 입학하여 서울로 갔고, 93년 승가대 학생회장이 되면서 94년 종단개혁의 소용돌이 한가운데 서 있었다. 개혁종단이 들어서기까지 승가대의 역할은 컸다.
96년 금강 스님은 미황사에 내려와 1년 반 정도 부도전 탁본을 하며 지내기도 했는데 “미황사와 구산선문”이라는 주제로 탁본전을 열어 미황사라는 이름이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동안 미황사를 지키고 일군 이는 현성 스님이다. 그러니까 미황사를 이야기할 때 금강 스님과 함께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지금의 미황사 모습은 거의 현성 스님의 불사 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금강 스님이 현성 스님을 처음 만난 것은 은사스님을 모시고 절에서 중학교를 다닐 때였다. 집에 있기보다 절에 있는 것을 더 좋아한 스님은 부모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절에 와서 은사스님 밥을 해드리면서 학교를 다녔다. 스스로 원한 것이지만 무척 힘들었는데, 이때 군대를 갓 제대한 현성 스님이 관세음보살처럼 나타나 밥하는 일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현성 스님은 은사스님의 사형 되는 스님의 상좌였다. 얼마나 고마웠는지 지금도 고맙다는 생각이 든다고 금강 스님은 말한다.
현성 스님에게 단점이 있다면 대중적이지 못하다는 점.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것을 즐기지 않는다. 주지임에도 심지어 초파일조차 법당에서 절만 하고 퇴장한다. 그래서 법문은 늘 금강 스님 몫이었다. 대중과 만나고 프로그램을 하나 짜는 것도 금강 스님의 몫이다.
현성 스님은 금강 스님이 오면 떠나고 금강 스님이 불가피하게 떠나야 하면 돌아와 절을 지킨다.
사실 금강 스님은 여러 활동을 접고 3년 예정으로 선방에 들어가 있을 참이었다. 그런데 두 차례의 결제를 마치고 미황사에 들렀다가 현성 스님이 자리를 뜨는 바람에 눌러앉게 되었다. 스님은 안 되겠다 싶어 현성 스님에게 조건부 타협안을 내놓았단다. 내가 프로그램이나 기획을 해서 진행을 할 테니 절 건물과 관련된 일은 현성 스님이 맡아달라는 것.
현성 스님은 지금 미황사의 하드웨어를 담당하고 있고, 금강 스님은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중이다.
그러나 여전히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익숙지 않은 듯하다. 불사를 지휘하는 스님께 인사를 드리니 고개만 끄덕하며 받고는 말을 건넬 곁을 주지 않고 인부들과 이야기하기 바쁘다.

2000년 들어 금강 스님이 주지가 돼 본격적으로 절일을 시작하면서 미황사에서는 각종 행사가 끊이지 않는다. 제일 먼저 시작한 것이 어린이 한문학당. 2000년 여름 시범적으로 시도한 것인데 그해 겨울 95%의 아이들이 다시 들어오는 호응을 얻으면서 매년 여름 겨울 방학마다 2회씩 실시하고 있다. 올해로 6년째를 맞이했는데 신청자가 많아 일찌감치 신청하지 않으면 참가가 어려울 정도다. 기간은 7박 8일.
“면회사절, 전화금지 등 부모의 보호로부터 단절된 상태에서 아이들은 진행자의 말과 행동을 스폰지처럼 빨아들입니다. 자기들이 갖고 놀던 기구가 아무것도 없으니 날이 갈수록 주변의 산과 절과 나무들과 별, 노을이 보이기 시작하지요. 그리고 가면서 어떤 아이가 산과 절이 그려진 액자를 보면서 말하더군요. ‘우리가 그림속에서 뛰어놀았던 것 같아요’하고. 아마 평생 한 장의 그림을 품고 살게 되지 않을까요?.”
어른들을 위한 참선법회도 매월 7박 8일씩 진행하고 있다. 스님은 이 기간을 선호한다. 짧지도 않고 길지도 않은 기간이기 때문이다.
음악회는 노을 별 달 등을 보며 혼자 보기 아깝다는 생각에 지인들을 불러 시작한 것이었다. 음악회의 특징은 유명가수를 부르지 않고 지역 사람들 가운데서 선정한다는 점이다. 그러다보니 지역축제가 됐다. 그리고 지금은 음악회가 법회로 발전해서 괘불재가 거행된다.
초파일에는 노인들 노래자랑을 하는데 2,000명이 넘는 사람이 참석한다.
그저 한번 하는 이벤트성보다는 길게 봐서 지역문화도 발전하는 계기가 되는 행사이길 바란다. 절의 행사는 지역민과 함께 해가는 것이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2002년부터는 템플스테이 사찰로 지정돼 우리 나라 사람뿐 아니라 외국사람들이 한국의 사찰을 체험할 수 있는 계기도 주고 있다.
스님은 지금 진행하는 프로그램들이 1회성이 아니라 프로그램화 되어 어느 절에서든 활용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리고 미황사가 한문학당이나 참선법회, 템플스테이 등을 성공적으로 운영하여 우리 나라 산중사찰의 성공적인 모델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도 크다. 우리에게는 따라 할 모델이 없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절들이 너무 멀어서, 우리 절은 잘 곳이 마땅치 않아서 등등의 여러 이유를 든다. 그러나 금강 스님은 조건을 문제삼을 것이 아니라 현재 갖고 있는 조건을 최대한 활용하여 진행할 수 있는 프로그램들이 있다고 말한다. 미황사도 따져보면 결코 좋은 조건일 수만은 없다. 그러나 악조건을 호조건으로 만드는 것 또한 능력이고 노력이다.

금강 스님은 좀더 길게 볼 때 틱낫한 스님의 프롬빌리지 같은 수행센터가 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10년 전쯤에 미얀마에 있는 마하시 선원에서 위빠사나 수행을 하면서 큰 충격을 받았다. 들어오는 사람 누구에게나 외국인이나 국내인이나, 재가나 승려나를 막론하고 스승 한 명을 붙여주어 지도해주고 이끌어주는 것을 보고 감명을 받았다. 우리 나라 같은 경우 재가자들에게는 선을 할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는 점도 안타까웠다.
서옹 스님 밑에서 참사람수행원장을 하면서 나름대로 재가나 출가자를 막론하고 누구나 수행할 수 있는 수행센터를 생각했었다. 그런데 기존의 틀이 강한 본사급 사찰에서는 그것이 어려운 일임을 알게 되었다.
금강 스님은 미황사에 한국선을 수행할 수 있는 국제적인 수행센터를 계획하고 있다. 그리고 그 실현을 확신하고 있다.

작은 시내가 큰 바다를 이루듯 스님의 시도와 노력이 별처럼 빛나길 기원해본다.
옅은 안개에 가려 어렴풋이 모습을 드러내던 달마산의 위용이 눈에 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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