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04-12-17 16:13
[월간불광] 역사와 전설이 살아있는 절-미황사
 글쓴이 : 월간불광
조회 : 1,815  

글·황찬익 사진·윤명숙


어 떤 인연이었을까? 삼천리 반도 끝 이 해남 땅이 천년이 지나도록 삼재가 머물지 못할 땅이 되어 임진란의 영웅 서산휴정 스님의 의발이 모셔지게 된 것은…. 이후로 이곳 해남에서는 소요,태능, 편양,언기 스님 등 서산대사의 상족들에 의해서 조선 후기 불교가 다시금 활짝 꽃을 피우게 되고 그 법맥이 지금까지 내려와 전체 승가의 8할에 달하게 되었으니 아무리 따져도 그 인연이 깊이는 골수에 사무칠 따름이다.
임진란은 민족사의 비극이요, 불교사에 있어서도 비극이었다. 전국의 사찰을 돌아다니며 볼 때 임진란에 절이 모두 소실되었다는 기록을 숱하게 만나게 된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 전쟁을 통해서 불교는 억불의 사회적인 통념을 일순간 뒤바꾸는 계기를 만들기도 했으니 전국에서 일어난 승병의 전과는 관군의 그것보다 눈부시게 찬란했기 때문이다. 거기다 종전 후 일본에 보내는 사신으로 누구도 마다하는 가운데 사명 대사를 뽑아 보냈으니 그 다녀온 성과를 굳이 표현하지 않는다고 해도 나라를 대표해서 다른 사람도 아니 '스님'이 다녀왔다는 것만으로도 불교의 위상은 크게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임진란에 불타버린 절들이 이후 백여 년 동안 활발하게 중건되고 그 이전에 이미 없어졌던 절들도 이때를 기화로 중창하게 되었다. 사실 절을 짓는데 드는 비용은 스님들의 탁발만으로는 가능치가 않다. 나라의 지원 혹은, 지방 관리나 부호들의 출자가 없이는 힘든 것이 중창불사인데 수많은 전국이 사찰이 이때 한꺼번에 불사를 이루었음은 당시의 사회에서 불교의 위상이 일시에 높아졌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뒤로 보이는 달마산의 바위 군락이 500 나한이 좌선하는 듯하다. 병풍처럼 펼쳐진 달마산 아래 미황사는 조선후기까지 대찰의 면모를 유지했다고 한다.
여하튼 이때 해남을 거점으로 불교가 다시 꿈틀거리며 살아나 점차로 인근 강진과 지리산 일대로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대둔사는 조선후기 불교를 대표할 만한 12대 종사(楓潭, 醉如, 月渚, 華岳, 雪岩, 喚醒, 碧霞, 雲峰, 霜月, 虎岩, 涵月, 蓮潭)와 12대 강사(萬化圓悟, 燕海廣悅, 雲谷永愚, 懶庵勝濟, 影波聖奎, 雲 鼎馹, 退庵泰瓘, 碧潭幸仁, 錦州福慧, 玩虎尹佑, 朗岩示演, 兒庵惠藏)를 배출하며 당시의 교학과 선풍을 이끌어 나갔다. 이렇게 결집된 힘은 강진의 만덕산 백련사(백련사의 조선시대 8대 종사 - 逍遙太能, 海雲敬悅, 醉如三愚, 華岳文信, 雪峰懷淨, 松坡覺暄, 晶岩卽圓, 蓮坡惠藏)로 또는 땅굴의 미황사로 자연스레 넘쳐흘러 인근에 유배온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 등 당시 실학의 대가들과도 교류가 가능하게 하는 숨은 저력으로 내재해 있었다.
답사여행이 일반화된 이후 다산초당을 끼고 있는 강진 백련사나 초의 선사의 유적이 남은 두륜산 대둔사는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져 계절에 상관없이 숱한 인파가 몰려든다. 물론 아무 때고 그 나름의 인상과 감흥이 있기 마련이겠지만 백련사의 경우 아름드리 동백나무에 빨간 동백꽃이 만발하는 이맘때가 적격이요, 대둔사도 일지암 다향(茶香)이라도 훔쳐 맡아보려면 곡우를 조금 넘겨 첫차가 나올 때쯤이 제격일 것이다.

미황사 대웅전(보물 947호) 정면, 측면 각 3칸씩의 다포계팔작 지붕의다. 주추에 게, 거북, 연꽃 들이 새겨져 있고 대들보에는 불을 그려 모신 아름다운 건축이다.
공휴일이기에 번잡을 피하려다 보니 강진도 지나치고 어머니 품 같다는 두륜산에 안겨드는 안온도 맛보길 포기하며 내쳐 땅끝으로 향했다. 땅끝, 해남군 송지면. 그 가운데서도 가장 남쪽 끄트머리 꼭지점은 이곳 사람들에 의해 '칡머리'라고 불리운다. 멀리 바다에서 바라보면 낮은 산꼭대기에 갈산당이라는 당집이 있었기에 그렇게 불렀다고….
이 당집에서 모셨던 갈산할매는 하도 기가 세고 성질머리가 사나워서 타지 배가 이 앞바다를 지날 때면 꼭 배에서라도 이곳을 바라보며 제사를 지내야지 안 그러면 풍랑을 만났다고 했다. 동네에서도 그쪽을 보고 오줌이라도 누면 성기가 퉁퉁 붓기 일쑤여서 아직도 그런 터부가 어른에서 아이들에게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그 사나운 성질 때문에 대접받고 살았던 그 당 할매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이 부리는 성질 때문에 지금은 작은 당집 하나 건사하지 못하고 산다. 무너져 내린 당집을 누구 하나 나서서 지어줄 생각을 못하는 것이다. 혹시라도 부정이 타든지 당 할매한테 밉보일까 두려워 동네 사람들이 접근조차 안 하는 것이다. 이렇듯 땅끝이 그냥 땅의 끝만이 아니다. 사람이 가질 수 있는 땅에 대한 외경과 그런 전통의 끝이기도 하다.
땅끝 어디에서도 바라다 보이는 산이 있다. 달마산이다. 아득한 서역에서 달마대사가 동쪽으로 향해 옴으로써 직지인심의 불법의 진수가 전해졌듯 동으로 동으로 향하던 조사들의 선지가 이 땅 끝에 다다라 더 이상 갈 곳 없음에 둘러앉아 함께 수도라도 하듯 달마산 꼭대기에는 일만의 수도승을 빼닮은 바위들이 여기 저기 좌선을 틀고 앉아 천년 동안의 해탈 삼매에 빠져 있다. 그 서쪽 기슭에는 신라 경덕왕 8년에 창건되었다는 미황사가 자리잡고 일만 수도승을 공양한다.
미황사는 신라가 한창 융성했던 8세기 중엽(749년) 의조(義照) 화상에 의해 창건되었다. 화엄경과 법화경 등의 경전과 공양구가 가득 실린 돌배가 땅 끝에 나타나 이 짐을 소에 실어 소가 멎는 곳에 절을 세우니 오늘의 미황사다. 이후 이렇다 할 기록이 없이 전해지다가 서산대사의 유품이 대둔사에 모셔지고 대둔사 7대 종사 벽하대우 스님과 8대 종사 설봉 회정 스님이 대둔사에서 이곳 미황사로 주석 처를 잇따라 옮기면서 사세를 크게 확장하게 된다. 그 뒤 1840년 경 이후로 또다시 사세가 쇠퇴하여 최근의 불사가 있기 전까지 이르게 된다.
아열대 수림이 주종을 이루고 있는 달마산 아래턱은 이국적인 느낌을 주고 있었다. 그 사이로 난, 차 한 대 지나다닐 수 있을 만한 소롯길을 따라 올라가면 새롭게 쌓은 석축 위에 번듯하게 서 있는 목조건축에 다름 아니나 가만 뜯어보면 옛 장인의 솜씨와 정성에 실풋 웃음을 베어 물게 하는 것들을 만나게 된다.

미황사 응진전(보물 1183호) 대웅전 좌상측에 자리하고 있는 여섯칸 건물이다. 1993년 도지정 문화재에서 보물로 승격되었다.
우선 정면 주초석들을 살펴보면 화려하게 피어나는 연꽃들이, 석조예술이 한창 물올라 있던 통일신라의 석조물을 대하는 듯 반갑다. 그 아래로 자라와 게가 애기 손바닥만씩 하게 새겨져 있기도 한다. 단청이 다 벗겨진 겉과는 달리 안에는 화려하게 단청 빛이 남아 있어 다른 곳과 비교할 때 특징으로 꼽는, 들보에 그려진 천불(千彿)의 모습이 희미하게 나마 살아나고 있다. 최근에 터를 다시 고르고 불사를 한 탓인지 절 마당 한켠은 넓은 공터로 남아 있고 정돈된 석축은 아직 모서리마다 날이 서 있다. 대웅전에서 석축을 따라 올라가면 작은 규모의 응진전(보물 1183호)이 외벽 담을 두르고 서 있다. 어쩐 일인지 문이 굳게 잠겨 있어 문틈으로 18세기 초에 조성되었다는 부처님과 16나한상, 네 명의 동자상과 시기가 오래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명패까지는 겨우겨우 살펴볼 수 있었으나 문 입구 좌우에 서 있을 금강역사상은 못 보고 말았다. 이 응진전 마당에서 내려다보는 전경은 일품이다. 특히 해질 녘 진도와 그 밖의 뭇섬들이 붉은 바닷물 위로 떠 있는 모습은 가히 절경이라 하는데 그날따라 잔뜩 낀 바다안개가 저녁까지 걷히지 않아 안복(眼福) 없음을 자조케 했다.

미황사 부도림과 사적비
절에서 남쪽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 500미터쯤 가면 유명한 미황사 부도림(浮屠林)을 만날 수 있다. 대둔사보다 더 많다는 28기의 부도와 5개의 부도비가 외진 곳에 한데 모여 있는 것이다. 이 모두는 조선 후기의 것으로서 질박한 솜씨와 친근한 느낌을 주고 잇다. 바로 아래에는 거대한 규모의 사적비가 서있고 남쪽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 100미터쯤 더 가면 5기의 부도가 더 서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부도로 모셔진 스님들은 조선 후기 대둔사와 미황사 대중의 존경을 받는 큰스님들로서 조선후기 화엄의 대가로 꼽히는 연담유일 스님을 비롯해서 대둔사 12종사의 한 분인벽하, 설봉 그리고 정련, 정암, 송파, 낭암…등 당시의 내로라하는 스님들이다. 이 부도림으로 하여 당시 미황사의 사세나 이곳을 중심으로 수행했던 스님들의 수행의 깊이를 미루어 짐작할 따름이다. 미황사에는 최근까지도 마을사람들의 민심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는 두 가지 영험이 있다. 하나는 대웅전 부처님 뒤켠에 모셔둔 높이 12미터 짜리 괘불이고 또 하나는 달마산 꼭대기에 있는 금샘이 그것이다. 괘불은 그 크기가 하도 커서 꺼내 볼 수 없어서 이곳에 머물고 계신 금강 스님께 말씀드려 단 하나뿐인 사진을 꺼내보고 빌려 올 수 있었다.

웅대한 규모의 사적비
이 괘불을 마을 사람들에게는 '하늘님의 마누라'로 통한다고 한다. 그래서 지독한 가뭄이 들면 마을사람들이 찾아와 괘불을 내걸고 마을제사로 기우제를 지내자고 요청한다고 한다. 실제 근래 몇 년 간 두어 번의 기우제 때마다 마른하늘에서 갑자기 비가 쏟아져 그중 한 번은 괘불의 배접이 떨어져 멀리 해인사까지 가서 빈 학교 강당에 펴놓고 배접을 했다고 한다. 다 펴놓을 마땅한 자리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물론 또 한 번의 기우제 때도 영험은 어김없이 보여져서 그림을 또 한번 망칠 뻔했지만 다행히 그때는 배접을 하기 전이어서 얼른 접어서 비를 피할 수 있었다고 한다. 또 다른 영험, 금샘을 찾으러 가는 길은 험했다. 왕복 한 시간 남짓이라고 했는데 두 시간이 넘어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스님께 약도까지 그려 받았지만 산중에서 약도라는 것이 그렇게 허무맹랑한 것인지 처음 알았다. 바위산이라 올라갈수록 깎아지른 절벽에 가까운데 길을 한번 잘못 들면 꼭대기에서 바로 낭떠러지가 나오기 일쑤였다. 길을 놓치고 나무숲을 헤매가 가까스로 다른 길을 찾아 오르니 거짓말처럼 금샘이 거기 있었다.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콸콸 쏟아져 나올 때가 있고, 아무리 홍수가 져도 바짝 마른다는 샘. 또 신심 깊은 사람에게만 물이 금빛으로 보여 물위에 글씨를 써도 그대로 글씨가 보인다는 영험 있는 약수다. 실제로 근래에 금빛으로 반짝이는 사진이 한 신문사 기자에 의해 최근에 소개되기도 해서 방송국이나 신문사에서 수없이 찾아왔지만 금빛은커녕 물이 바짝 말라 있어 깊이 일 미터 구멍만 찍고 돌아갔다고 한다.
금빛 물 위에 글씨를 쓰고 바가지로 떠내면 글씨가 없어지는 영험한 풍경을 가슴 뛰게 기대하며 바위굴에 다가서는데 마음 한편에서는 최근 3개월 간 찾은 사람들이 물맛도 못 보고 갔다는데 물맛이나 봤으면 좋겠다는 방정이 솟아났다. 굴 안을 살피니 바닥에서 한 2센티미터쯤 물이 고여 있었다. 고생고생하며 올라온 수고를 달래느라 잠시 물이 고이게 한 것일까. 바가지를 기울여 한 모금 마시는 물맛이 꿀보다 달다. 물이 금빛이 아닌 것을 탓해야 할지 물맛이라도 본 것을 행복해 해야 할지…. 괜히 올라왔다는 후회는 없었다.
내려오니 공양주 보살이 물이 있더냐고 물어 한 모금 잘 마시고 왔다고 하자 무심한 사람, 병 하나도 안 가지고 올라갔느냐고 나무라는 걸 들으니 오히려 기분이 더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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