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04-12-17 16:18
[투어남도] 은둔의 가람 미황사
 글쓴이 : 투어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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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투어남도에서 발췌한 글입니다.

▽ 미황사 돌계단 풀꽃들

미황사에는 일주문도 없다. 해탈문도 없다. 불법을 수호한다는 무서운 사천왕상도 없다. 그러나 봄이면 참꽃이, 여름이면 분홍색 솔나리며 노란 원추리가 가을이면 개미취나 쑥부쟁이, 겨울에는 하얀 눈 속의 핏빛 동백꽃이 어느새 우리를 해탈의 길로 끌고 간다.

잠시 길가의 들꽃에 눈을 맞추어 걷다보면 산 아래서는 보이지 않던 절이 대웅전 머리부터 그 모습을 드러낸다. 달마산에 절을 짜 맞춘 듯 산 속에 들어앉아 보는이로 하여금 절이 산의 일부인지 산 전체가 가람인지 모를 정도로 미황사와 달마산은 자연과 인간의 조형물이 어울려 새로운 아름다움을 불러일으킨다.

▽ 인도에서 땅끝으로

신라말(경덕왕 8년) 땅끝 사자포에 한 돌배가 다가왔다. 그 배에는 많은 경전과 탱화, 금환과 흑석이 실려 있었다. 그 흑석이 저절로 벌어지면서 검은 소 한 마리가 나타나 커졌다. 그날 의조화상의 꿈에 금인이 나타나서 "내가여러나라를 돌아다니면서 경상모실 곳을 찾아다니던 중 이 곳 달마산에 일만불이 나타나므로 여기에 온 것이니 경을 싣고 가다 소가 지쳐 '미'하고 울며 누운 곳에 통교사를 짓고 다시가다 마지막으로 누워 죽은 곳에 불상을 모실 절을 지으라." 했다고 한다. 이것이 미황사 사적비에 기록된 창건 설화다.
미황사의 '미'는 소의 아름다운 목소리를 취하고 황은 금인의 황홀한 색을 취해 미황(美黃)이라 부른 것이다.
그 검은 소의 무덤은 미황사 아래 돌담 많은 마을 우분리(牛墳里)에 모셔져 있다고 한다.
미황사의 창건설화는 불교의 남방전래설을 뒷받침하것으로 역사적인 큰 의의가 있다.

▽ 바다를 품고 하늘로 날 듯한 대웅전

염주를 굴리 듯 한 발 한 발 계단을 타고 오르면 바다처럼 푸른 하늘, 우뚝 솟은 달마산과 그 아래 대웅전의 팔작 지붕이 춤을 추듯 흔들리며 다가온다.
세월에 다 벗겨진 단청,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이 금방이라도 하늘로 날아오를 듯한 화려한 공포의 아름다움에만 눈이 팔린다면 땅끝까지 와서 미황사를 찾은 보람이 없다. 발 아래를 내려다보면 연화문과 함께 바다에서 사는 게와 자라가 새겨진 주춧돌을 볼 수 있다.

이는 다른 절에서는 보기 드문 문양으로 미황사가 위치한 이곳이 바다와 접해있고 미황사의 스님들이 바다에 빠진 사람들의 영혼을 구제하기 위해 수륙제를 지내왔다는 점으로 미루어 민간풍습과 융화되어가는 불교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미황사의 대웅전은 위에서도 내려다 볼 수 있는데 대웅전과 응진당 사이의 계단에서 대웅전을 바라보면 온 세상의 업을 이고 금방이라도 나아오를 것 같은 대웅전의 모습에 취해 버릴 것이며 그 시간이 서쪽 바다로 해 떨어질 무렵이라면 마음속 찌꺼기는 산산이 부서져버릴 것이다.
"동해 낙산사의 일출이오 남해 미황사의 낙조라."
당대의 문객 매월당 김시습의 읊조림은 이곳을 스쳐가는 나그네의 순간 감홍만은 아니리라.
비오는 날 미황사를 찾는 분들은 대웅전 측면에 있는 기둥 밑에서 절대로 담배를 피우지 말라. 그 기둥에는 비오는 날 "금연"이라는 글씨가 빨간색으로 나타나니.

▽ 하느님의 마누라 미황사 괘불

대웅전 안에는 하느님의 마누라라고 통하는 괘불이 모셔져 있다. 이 괘불은 조선 후기 괘불로 높이가 12m, 폭이 5m나 되는 큰 것이다. 이 쾌불은 다른 쾌불처럼 야외 법회때 걸기도 하지만 또 다른 용도로도 쓰여져왔다.
가뭄이 극심할 때 이 괘불을 걸고 제사를 지내면 비를 내려준다고 한다. 이는 제사때 돼지를 잡아 제를 올리면 하느님이 자기마누라가 있는 곳이 지저분해 비를 쏟아 이를 씻어내 준다는 것이다. 비를 내리게 하는 방법도 가지가지지만 이처럼 높고도 신성한 존재를 적절히 이용할 줄 아는 꾀를 가진 이 곳 사람들은 별주부전에 나오는 토끼가 달마산 토끼였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 같다.

▽ 조선 부도의 최고봉

우리는 언제부턴가 무엇이 '최대'니 '최고'니 하는 말을 자주 쓰게된 것 같다. 그것이 사실일 수도 과장된 표현일 수도 있겠지만 미황사의 부도는 그런 표현이 아깝지 않언 참으로 아름다운 것임에 틀림없다.
대웅전에서 남쪽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 10여분 걷다 보면 휘늘어진 늙은 장송 아래 줄지어 아담하게 자리잡은 한적한 부도밭에 이른다.

문고리를 잡아당기면 금방이라도 스님이 나오실 것 같은 부도, 옥개석에 귀면이 무섭기보다는 장난이라도 치고 싶은 부도. 그리고 대웅전에도 있었던 게와 자라며, 오리, 물고기, 문어, 원숭이, 토끼, 화초들이 새겨진 부도들은 종교적인 권위보다는 민중들의 풍속과 조화를 이루고자 했던 미황사 스님들의 온화함을 엿볼 수 있다.
마황사의 부도는 조선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동쪽에 21기, 서쪽에 6기가 세워져 있다. 이 시기에 이렇게 많은 부도가 조성된 것은 대둔사와 미황사 뿐이다. 이는 이 지역이 조선후기 불교의 중심지였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 물거품이 된 중창불사의 꿈

무엇이 생겨나고, 커지고, 없어져 간다는 것은 우주의 섭리라고들 한다. 그러나 사라짐이 새로운 탄생을 낳는다면 모르겠지만 아무런 기약 없이 사라져버린 것은 인간사에서는 더없는 허무함이 아닐는지.
미황사는 조선 후기까지는 열 두 암자를 거느렸고 만일회를 개설할 정도로 널리 알려졌던 사찰이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많은 사찰이 그랬듯 미황사 또한 여러 사정으로 인해 쇠락의 길을 걸어야 했다.
번영과 쇠락을 한 시대에 겪은 이가 이 지역 출신인 혼허스님(1826∼1894)이다. 그는 융성한 절을 되찾기 위해 중창불사를 계획했다. 군고패(풍물패. 엄밀히 말하면 金鼓패이다)를 조직해 돈을 모으는 '걸립의 장정'을 떠난다. 육지를 돈 후 완도 청산도를 최종 목적지로 삼고 땅끝 당하리(갈산마을)에서 무사고를 비는 제를 올린다.
그날밤 스님의 꿈속에 어여쁜 여인이 나타나 유혹의 손길을 보냈다. 불길한 예감은 들었으나 중창불사의 희망 속에 못내 묻어버렸다. 예감이 맞은 탓일까 뭍을 떠나 '돈 실러가는 배'는 청산도를 밟기도 전에 갑작스런 풍랑에 휩싸여 수장되고만다.
물거품이 된 것은 미황사의 중창불사만이 아니었다. 그 시대의 최고 멋쟁이인 남도 풍물굿의 기예꾼들이 하루아침에 물귀신으로 둔갑해 버린 것이다.
그때는 이미 서방의 문물이 서서히 밀려들어오는 즈음이었다.
120여 년 전 일이었으니까.

▽ 열려있는 가람 미황사

허무하게 종지부를 찍은 중창불사의 꿈은 100여 년을 넘겨서야 비로소 이루어지고 있다. 잡초는 뽑고, 건물은 고치거나 새로 짓고 하여 미황사는 폐허의 '황성옛터'에서 칠보단장한 어여쁜 가람으로 변모하고 있다.
미황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있는 가람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한 예로 매월 첫째 토요일 대중 참선법회를 진행해오고 있다. 토요일 저녁부터 다음날 아침10시까지 진행되는 참선은 자신을 돌아 볼 수도 있고 사찰에서 하룻밤을 묵을 수도 있는 좋은 기회이다.

꼭 불교 신자가 아니라 할 지라도 절집의 분위기와 산 속에서 동터오는 새벽을 맞이할 수 있는 독특한 경험을 할 수 있다.
이밖에도 다양한 법회와 어린이 수련회를 기획하여 열린 공간을 통해 지역민들과 함께 할 수 있는 거리를 만들어가고 있다.
이것이 중창불사의 참뜻 중의 하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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