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04-12-17 16:59
하늘말나리꽃이 지기 전에 -<꽃이 진다 꽃이 핀다 > 中
 글쓴이 : 박남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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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말나리꽃이 지기 전에

-미황사

햇빛이 반짝인다. 방 안까지 밀려온 아침 햇살이 금세 후두둑 비를 뿌린다.양철 지붕위에도 감나무 푸른 잎새 위에도 소나기처럼 금세 비를 뿌린다. 어- 날이 벌써 개나 보네. 햇살이 반짝인다. 여우비. 호랑이가 장갈 나. 전화벨이 울린다. "오늘 중복 꽤 덥지요. 그러나 말입니다. 땀 흘리는 날들 아름다운 것입니다. 더위야 뭐 제까짓 게 얼마나 가겠습니까. 곧 입추가 오고 가을이 머지 않았습니다. 그때까지 견뎌봅시다. 연락사항 남겨놓으시고요. 그리고요. 수박이라도 한 덩이 깨서 복달음하시고요. 그럼 안녕."
"저 금강입니다. 하늘말나리꽃이 올해는 더 많이 피었습니다. 한번 오셔요." 띠띠띠띠띡.
잠시 개울가에 나가 있는데 자동 응답기에 녹음된 해남 미황사 금강 스님의 전화였다. 하 그러고 보니 어찌 봄이 갔다 오고는 그간 미황사에 가질 못했구나.
홍타령의 한 대목에 그런 절절한 노랫말이 있다. "내 정은 청산이요. 님에 정은 녹수로구나 녹수야 흐르건만 청산이야 변할 리야……"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고 했던가. 그리하여 한치 내일 앞을 알 수 없는 미망의 삶이므로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고 했는가.
그렇게 흔들리지 않을 것 같았던 내 젊은 날의 서슬 푸른 사랑도 잊혀지고 지워져서 장막 같은 안개를 피워올린다. 마치 벼리지 않은 날이 녹슬고 무디어진 채 스스로를 허물고 무너지듯 이제 그 흔적이 까마득하다.
그러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어디 있겠는가. 만나고 헤어지던 그 인연과 사랑의 일들이 나를 여기에 이르게 한 힘이었다는 것, 그것이 다시는 반복하고 싶지 않은 쓸쓸함과 절망의 늪과 같은 것이었을지라도.
부유하는 것만이 나를 지켜내는 것이라 생각했다. 세상의 문밖을 기웃거렸다. 다만 하루의 날이 저물고 다시 눈을 뜨기까지, 그날을 견뎌내는 것이 살아가는 것이라 여겼을 뿐, 그 어떤 소망의 이름을 그때 내 헤매임의 발길 앞에 두었던 것은 아니였다.
그랬던가. 아니다. 그때 내가 주문처럼 소원하던 것이 있었다. 이생에서의 삶이 끝나면 다시는 그 어떤 이름으로도, 그 어떤 생명의 끈으로도 인연 지어지지 말았으면 하는 간절한 것이 있었다. 미황사를 찾았던 게 그 무렵이었던가. 남쪽 땅의 여기저기를 애써 눈감으며 다니던 끝이었는가.

유곽을 찾듯 산을 건너왔으나 보이는 저 산으로 가면 모든 길의 지척은 첩첩의 빗장을 걸